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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이모저모

울산, 화학연, 그리고 고래들

작성자  조회수1,850 등록일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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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 히스토리

울산, 화학연,
그리고 고래들

 

 

 

신석기 시대 말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선사시대 사람들의 수렵 생활이 바위에 새겨진 이 유적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해양생물, 특히 ‘고래’입니다. 비록 원시적인 벽화이지만 고래만큼은 지금 봐도 놀랄 만큼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새끼를 등에 올려놓는 습성을 가진 귀신고래, 앞뒤가 색이 다른 범고래, 유별나게 큰 혹등고래 등이 종류별로 그려진 데다 미 끼, 그물, 작살 같은 사냥도구와 고래를 뒤쫓는 나무배,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까지 등장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인류 고래잡이 역사의 시작 부분에서 가장 처음 언급되곤 합니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고래잡이 역사는 매우 깁니다. 한 번만 사냥에 성공해도 육지동물 수십 배, 수백 배의 고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옛 선조들에게 충분히 목숨을 걸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포경이 활발했던 시기에 고래를 잡는 가장 큰 동기는 고기가 아니라 기름, 즉 경유(鯨油)였습니다. 고래에게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기름이 도시의 가로등 램프를 밝히고 양초와 비누의 원료가 되었지요. 특히 기계공업이 발달한 산업혁명 시기에는 윤활유의 수요가 폭증하며 전 세계 바다에서 고래를 무차별적으로 남획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석유화학산업의 발전이 없었다면 고래가 일찌감치 멸종되었을 거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래잡이 기지였던 울산은 천혜의 국제무역항이기도 했습니다. 가깝게는 동북아와 인도, 멀게는 중동의 이슬람 세계나 로마제국과도 교역이 이뤄지던 통일신라시대 수도 서라벌의 외항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쇠락을 거듭한 울산은 20세기 초까지 그저 평범하고 빈한한 바닷가 마을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1962년. 식민지와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고 있던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과감한 중간진입 전략을 통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특히 바람과 갈대뿐이던 울산만 일대를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은 가난했던 한 나라의 운명을 극적으로 뒤바꾸는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1967년 울산에서 용틀임을 시작한 대한민국의 석유화학산업은 반세기만인 오늘날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세계 석유화학산업의 빅4로 거론될 만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세계 석유화학산업의 판도는 흔히 생각하듯 원유 매장량이나 수출량이 아니라 다양한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인 기초유분의 생산규모에 따라 좌우됩니다. 석유화학산업은 고도의 공정 설계와 대규모의 복합장치를 필요로 하는 기술집약형 산업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거물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이런 기초 화학원료의 생산능력을 꾸준히 강화시켜 온 결과입니다. 여기에는 1976년 연구소 출범 이래 줄기찬 연구개발을 통해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해온 화학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6년부터 한 발 앞서 대한민국 산업 경쟁력의 허리인 울산에서 고부가가치 정밀화학과 첨단바이오 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여온 화학연은 2012년 울산 신화학실용화센터 설립을 시작으로 미래형 석유화학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마중물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정밀화학융합기술연구센터와 바이오화학연구센터가 울산에서 굵직한 연구 성과들을 창출하고 있는데요. 울산과 고래, 석유화학산업과 한국화학연구원의 묘한 역사적 인연을 되짚다 보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