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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통 ‘올해의 KRICT인상’ 주인공은 “나야, ○○○”

작성자  조회수426 등록일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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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스토리
30년 전통 '올해의 KRICT인상'
주인공은 "나야, OOO"

 

 

안녕하세요!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몰랑몰랑 볼살이 더욱 빵빵해지고 있는 케미입니다. 사실 가을은 큰 일교차와 호르몬 변화로 새 이성 친구를 사귀기에도 좋은 타이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몸매관리에 부쩍 더 신경을 쓰곤 하는데 올해는, 망했어요. 장안의 화제가 된 ‘흑백요리사’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볼거리인 스타 셰프와 숨은 고수들의 진기한 요리 대결을 보고 있노라면 ‘아는 맛이 아니라 다행이야’ 하다가도 어느새 ‘이븐’하게 익힌 달걀과 들기름으로 밥을 비비는 저를 발견하곤 했지요. 그런데 화학연에도 미슐랭 가이드처럼 가장 우수한 성과의 연구자들만 오를 수 있는 명예의 전당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Chapter 01
R&D의 미슐랭 가이드 

 

화학연에는 매년 단 한 명의 연구자에게만 특별한 상을 수여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수한 업적으로 연구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연구자를 뽑는 ‘올해의 KRICT인 상’이 그것인데요. 이 상이 더욱 특별한 것은 수상자의 명패가 화학연 행정동 1층 벽면에 전시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대대손손 자랑으로 삼을 만한 영예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올해도 어김없이 새로운 수상자를 위해 마련된 빈자리의 주인이 지난 8월 제48주년 창립기념 행사를 통해 가려졌습니다. 한국 불소계 소재 연구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박인준 박사(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Q 먼저 ‘올해의 KRICT인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연구에 임하고 계신 전도유망한 젊은 연구자들 가운데서 제가 이 상을 받게 되어 계면쩍습니다. 제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큰 상을 받게 됐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Q 1988년 입사 당시의 과정을 말씀해주세요.

우리나라가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대회인 86아시안게임을 개최하던 해에 석사를 마쳐서 더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공은 화학공학과 유체역학이었는데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화학연 입사를 권하시더군요. 하지만 먼저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6개월 기간의 석사장교에 지원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1년가량 일반 기업에 몸을 담았고 이후 공채를 통해 화학연에 오게 됐습니다. 첫 출근이 1988년 3월 2일이었는데 88서울올림픽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이 최고조로 치닫던 때라 저 역시 ‘국가대표 연구소’의 일원이 된다는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Q 부모님께서는 화학연 대신 가업을 잇기 원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당시 아버님이 화학약품 제조업을 하였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규모로 영상·인쇄용 약품을 생산하셨지요(신진화학공업사).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화학공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진로도 미리 철석같이 못 박아 두셨습니다. 남자는 무조건 화공과, 여자는 의료보건 분야였지요. 남자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보조했는데, 아마 화공과를 졸업시킨 뒤 계속 조수로 쓰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모두 아버지 곁에 남지 않고 도망을 갔습니다. 저의 경우 화학연에 잘 다니고 있는 중에도 “정부의 일을 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자기 사업을 하는 것 보다는 못하다”라며 그만두고 돌아오라 하시기 일쑤였지요. 이미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하였고, 의미있는 연구에 집중하던 때여서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다 보면 늘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무리하게 연구개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Chapter 02
36년 한 우물

 

 

원자번호 9번 불소(fluorine)는 다른 원소들 대부분과 안정적인 결합으로 화합물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내열성·내후성·방수성·절연성·자외선 저항성 등 매우 우수한 특성을 나타내 산업적으로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물질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간 불소계 소재의 국내 수요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왔는데요. 화학연이 발수발유제 개발에 성공하면서 국산화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Q 화학연에서 첫 연구 과제였던 발수발유제 개발 당시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당시 책임자인 이수복 박사를 필두로 저와 김영율(전 한국바스프 사장), 이형달(현 대동켐텍 상무) 연구원, 그리고 이광원 기술원까지 4명이 한 팀을 이뤄 국내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불소 연구에 발을 들였습니다. 스포츠의류·텐트·우산·섬유 등의 코팅제인 발수발유제는 이종 분자계면에서의 상호작용과 같은 기초과학 지식뿐만 아니라 에멀젼, 고분자 중합 등 다양한 공학적 지식이 필요한 융복합 기술입니다. 현재 센터명인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와 정확히 일치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더더욱 강렬하게 흥미를 끄는 연구였고 매일매일 실험이 기대가 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인력도 장비도 부족했던 환경에서 남들이 하지 않던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라 좌충우돌도 많았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L 회분식 반응기에서 얻은 생성물이 직경 약 1~2mm 정도의 침전물 몇 개만 남을 정도로 매우 상태가 깨끗하고 좋아서 기뻐했는데, 그보나 천 배 더 큰 1천L 반응기에서 시운전을 하니 야구공만큼 큰 입자가 굴러다녀서 무척 낙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단 실험실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제조용량의 증대(scale-up)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Q 이후 과불소화알킬알코올, 프라이머, 지문방지제, 불소윤활유 등 소수의 선진국이 독점해 온 불소계 소재 개발이 거듭됐는데요. 당시 국내에서는 불소계 소재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던 데다 소속 연구자들도 많지 않은 상황이라 어려움도 상당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지금은 불소화학이 국가전략산업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하는 정부지원연구비 수주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에 연구자가 거의 전무하다보니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를 설득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지요. 일단 산업적 필요성을 설명하면 수입해 사용하는데 무슨 문제냐, 조금 비싸도 소량이니 그냥 수입해 사용하자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기껏 힘들게 과제를 만들기 위한 제안을 해도 화학연의 연구 독점을 우려하는 외부의 시선들로 인해 힘을 모으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요. 여기에 국내에 공급망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보니 중간 중간 과정을 건너 뛰며 연구할 수밖에 없어서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Q 오랜 기간 연구해 오신 폴리불화비닐리덴(PVDF)와 과불화술폰산 이오노머(PFSA) 제조기술이 기술이전 기업을 통해 활발히 상용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요?

불소수지의 일종인 PVDF는 다양한 외부환경에 견디는 내후성과 내오염성 등이 우수해 전기차 이차전지 양극재, 태양전지 필름, 취수장 분리막 등 산업 전반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후속 가공 및 조립 산업은 발달한 반면 원천 제조공정기술을 확보하지 못해 원재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해오고 있었습니다. PFSA 역시 수소차뿐만 아니라 에너지 저장장치(ESS), 분산전원, 수전해 등 미래 친환경 에너지 산업의 핵심 소재로 주목받고 있지만 매우 까다롭고 긴 제조공정으로 그간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독점 제조해 온 소재이지요. 이 두 소재의 사업화를 위해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기업 투자가 필요한데요. 화학연 연구진이 파일럿 장비, 설계자료, 운전교육에 이르기까지 상용화 전반에 걸쳐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결실을 맺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Chapter 03
"나는 과거…이제 후배들의 시간"

 

 

국내 유일의 불소계 소재 전문 연구그룹인 화학연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는 이번 박인준 박사의 수상에 앞서 이미 여러 번 묵직한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습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연속으로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된 것이지요. 일본 수출규제 사태를 계기로 오랜 기간 소홀히 다뤄져 온 국내 불소산업의 취약한 기반을 개선하는 데 아낌없이 지식과 경험을 쏟아 부어 온 박인준 박사와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연구진은 현재 핵심소재의 국산화를 넘어 선진국들도 아직 갖지 못한 고도의 첨단 신소재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Q 현재 주력하고 계신 연구와 향후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현재는 2가지 과제를 중점 추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개발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PFAS와 관련해서 불소 고분자의 일종인 사용 후 폐 폴리테트라플루오르에틸렌(PTFE)의 재활용(Close-Recycle)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환경에 부담을 주는 PTFE 수지를 분해해 기초 원료인 단량체로 되돌리는 연구입니다. 에너지 소비가 많은 기존의 고진공 열분해 기술을 상압 열분해 기술로 대체하려는 연구이지요. 장치투자비, 극한의 운전조건, 폭발가능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이 공정은 세계 1~2위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개선된 PFSA를 제조하기 위한 핵심 단량체 제조 연구로 국내 수소전기차 산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Q 박사님의 36년 불소 연구 여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을 꼽으신다면 무엇일까요?

화학연의 불소연구는 4년 전 정년퇴임하신 이수복 박사님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박사님의 집중적인 지도 아래 불소계 소재를 연구해 온 저는 사실상 그분의 아바타라고도 할 수 있지요. 한국 불소 연구의 선구자이자 전 세계 최고의 교관이신 이 박사님에게 수십 년 간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특히 오만하고 경솔했던 제 성격의 약점을 교정해 주시고, 늘 올바른 판단과 꾸준한 노력의 가치를 온몸으로 직접 보여주셔서 연구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길잡이가 되어주셨습니다. 감히 단언컨데, 이 박사님이라면 문제를 일으키는 세상의 어떠 사람도 교정이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Q 여가 시간에는 어떤 취미를 즐기고 계신가요?

무엇보다 축구를 좋아합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동료들과 협동심도 기를 수 있고, 순간적인 판단과 즉각적인 행동력이 필요한 운동이라 매순간 집중하다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집니다. 같은 몰입이라도 연구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지요. 물론 땀 흘린 뒤 함께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Q 끝으로 미래의 KRICT인 상 수상자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비록 올해의 KRICT인 상이란 큰 행운을 안게 됐지만, 따지고 보면 저는 우리나라의 기술발전 단계에서 선도자(First-Mover)가 아닌 빠른 추격자(Fast-Follower)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후배들이 더 좋은 교육 여건과 풍부한 연구 환경을 바탕으로 노벨화학상, 나스닥 입성 같은 큰 꿈을 가져야 하는 시대이지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습니다. 큰 꿈이 실현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연구하는 것이 스스로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젊은 연구자들이 선배들을 훌쩍 뛰어넘는 청출어람으로 대한민국의 더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