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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Issue

도토리 에너지로 '전기 숲' 일군다

작성자  조회수391 등록일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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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포커스
도토리 에너지로
'전기 숲' 일군다

 

 

에너지 하베스팅(Energy Harvesting)은 일상에서 버려지는 에너지들을 수확해 전기를 만드는 차세대 에너지 기술입니다. 태양광·풍력·조력·지열 등의 재생에너지와 함께 기후변화 시대 또 다른 친환경 동력원으로 부상하고 있지요. 이 기술로 모을 수 있는 에너지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사람의 체온, 옷깃의 마찰, 발바닥 압력, 자동차 엔진열과 교량 진동, 조명의 빛까지 그간에는 허공으로 흩어졌던 모든 종류의 에너지들이 수집의 대상이 됩니다. 최근에는 전선 주변의 전자기유도 현상, 와이파이에서 나오는 전파, 샤워기나 변기의 물 내림에서도 에너지를 모아 전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Chapter 01
자투리 에너지를 모아라

 

자투리 에너지로 전기를 만드는 에너지 하베스팅의 개념은 1950년대 미국 벨연구소가 소개한 태양전지 기술로부터 구체화됐습니다. 태양광을 모으는 태양전지처럼 온도 차이로 전류가 발생하는 열전효과, 진동이나 기계적 누름에 의해 전기가 흐르는 압전효과를 이용하는 소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개발된 열전소자로 냉·온 정수기와 와인쿨러가, 압전소재로는 라이터와 가스버너가 만들어졌습니다. 

 

 

21세기 들어 웨어러블·헬스케어 기기들의 개발과 함께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은 더욱 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전력 소형 전자기기에 에너지 하베스팅 부품을 장착하면 고장이 나기 전에는 배터리 교체나 충전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하베스팅은 특히 사물인터넷 시대에 더 큰 빛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건물이나 도로 등의 안전 점검, 환경오염 감시, 항공기·선박 수명 진단 등에 쓰일 사물인터넷 시스템에는 수많은 센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 전선을 연결해 전력을 공급하거나 주기적으로 배터리를 교체하는 일은 쉽지 않지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이 발전한다면 센서들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겠지요. 

화학연의 에너지 하베스팅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2014년 사람의 체온을 전기로 변환하는 유기열전소자를 개발하면서부터입니다. 약 3년간의 연구를 통해 탄생한 첫 번째 성과는 전도성 고분자 기반의 하이브리드 열전소재 개발이었습니다. 이 열전소재는 20℃ 미만의 온도 차이에서 0.1mW가 넘는 우수한 열변환 출력량을 선보이며 2016년 KRICT 혁신기술에도 선정되었는데요. 이 기술은 계속되는 연구개발을 통해 세계 최초의 인쇄공정 기반 텍스타일(Textile) 삽입형 열전소자, 한층 더 높은 열전성능의 카본나노튜브 웹 기반 유연열전소재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화학연이 개발한 성능이 오래 지속되면서 가볍고 유연하며 인쇄 공정으로 저렴하게 제조할 수 있는 유기 열전소재


이를 통해 2019년 다시 한 번 KRICT 혁신기술에 빛나는 ‘스펀지형 유연 열전소재 탄소나노튜브 폼’ 개발에 성공하게 되는데요.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스펀지처럼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유기열전 소재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기존의 무기소재 기반 열전소자가 딱딱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 탓에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부착해 전기를 생산하는 게 어렵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지요. 이듬해인 2020년에는 강력한 유기열전소재 후보로 꼽히던 고분자 ‘폴리티오펜’의 열전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연구 성과로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고분자 소재는 전기가 잘 흐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폴리티오펜이라는 고분자는 다른 물질을 도핑하면 열전성능이 향상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관련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문제는 폴리티오펜 열전소재의 성능이 공기 중의 산소와 수분 때문에 일주일만 지나도 80% 이상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한계를 염화금 이온과 금 나노입자가 생성되는 독특한 고분자 결정 구조로 극복하며 3주 이상 열전성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또한 화학연이 개발한 이 폴리티오펜 열전소재는 신문을 인쇄하듯 찍어내는 프린팅 공정으로 상온에서 간단하고 저렴하게 제작하는 방식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슬롯 다이 프린팅으로 열전소자를 제작하는 과정

 

 

Chapter 02
천 그루의 숲도 도토리 한 알에서


화학연 연구진은 움직이거나 휘어지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는 유연 압전소재 분야에서도 거듭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연 압전소재는 일반적으로 압력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특성의 물질과 탄성을 가진 고분자 물질을 섞어서 만듭니다. 그런데 기존의 기술로는 물질 간에 결합이 없고 입자들이 고르게 분산되지 않아 압력을 줘도 전기를 많이 발생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따라 2018년 화학연 연구진은 압전 나노입자와 고분자 물질을 화학적으로 단단하게 결합시키는 기술을 개발했는데요. 이를 기반으로 만든 유연 압전소재는 화학적 처리를 하지 않은 기존 소재보다 성능이 100배나 향상시키며 에너지 분야 과학저널(Energy & Environmental)의 표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화학연이 개발한 움직임으로부터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압전 소재


2020년에 개발된 신축성 정전기 소재 역시 또 다른 에너지 분야 권위지(ACS Energy Letters)의 표지논문으로 선정됐습니다. 이 새로운 정전기 소재는 기존 소재들이 주로 변형이 없는 형태에서 마찰로 정전기를 발생시키던 것과 달리 늘리거나 구부려도 소재 자체의 전도성이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전기가 발생하는 마찰 표면적을 최대화해 늘림과 구부림이 동시에 가했질 때 5배 이상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신체 관절의 움직임에서 늘림과 굽힘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층 더 실용적인 웨어러블 기기용 자가발전 소재가 등장한 것이지요. 

 

화학연이 개발한 어떤 형태로 변형해도 스스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전기 소재


그리고 올해 9월에는 기존 소재보다 발전량이 13배나 높은 마찰발전기 소재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마찰발전기는 마찰에 의해 생기는 정전기로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입니다. 걷거나 뛸 때 신발과 바닥 사이의 마찰로 스마트워치 등을 충전할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데요. 하지만 기존의 마찰발전기들은 구조적으로 전기의 자연적인 감소를 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반복적인 마찰로 마모가 되면서 출력과 성능이 저하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화학연 연구진이 제시한 해결책은 ‘이온 겔 전기 이중층’ 소재입니다. 이온성 액체를 얇게 굳힌 막을 이용해 마찰 후 생성된 전하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이 소재를 적용한 5백 원짜리 크기의 마찰발전기는 100개의 소형 LED 전구를 밝힐 정도로 매우 효율적인 발전성능을 나타냈는데요. 1만회의 반복실험을 통해 찢어지거나 구멍이 생겨도 발전량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안정적인 내구성까지 함께 선보였습니다. 

 

화학연이 개발한 마찰발전 소자. 가장 앞쪽부터 은박재질 전극과 전선 - 가운데 이온겔 전기이중층 소재 - 뒤쪽의 마찰 소재 순서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천 그루의 숲도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된다”라고 노래합니다. 장 지오노의 단편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도 수십 년 간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어 크고 아름다운 숲을 일구어낸 양치기 노인의 실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도토리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큰 세계를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늦가을 양볼 가득 도토리를 수확한 다람쥐들이 땅에 파묻고 잊어버린 자리에서 거대한 참나무 숲이 시작되곤 하지요. 

에너지 하베스팅 연구에서 세계 수준의 역량을 선보여 온 화학연 연구진은 현재 ‘고효율 소자’, ‘자유로운 형상 구현’ 그리고 상용화에 필수적인 ‘대면적화’를 위한 원천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실용적인 자가발전원의 완성입니다. 이를 통해 웨어러블·헬스케어와 사물인터넷 시대의 핵심기술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인데요. 이들의 꿈이 참나무 숲을 품고 있는 도토리처럼 이 가을 더 반질반질 단단하게 영글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